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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과 타력 - <정토진종 일행사 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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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량각 작성일17-08-30 16:26 조회59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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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과 타력에 대하여

                                                                                                                 - 정토진종 一行寺 住持 那須信孝 -

 

타력 말할 것도 없이 부처의 본원력이다.

진정으로 자력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음을 현실적으로 느낄 , 처음으로 타력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부처의 본원력 귀의하였다고 하여, 성취하기는 어렵고 사라지기는 쉬운 자신의 수행력을 버리는데 타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력에 대한 집착을 쉽게 버릴 수 없음을 진정으로 인정할 때 처음으로 우리는 절체절명이 된다.

즉 자력에 대한 집착 버리려는 사실 위에 이러한 자력을 버리려는 자신의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안다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자기의 수행력으로 도저히 성취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또 두 번째 의미는 자력에 집착하는 마음은 도저히 자력으로 버릴 수 없음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첫 번째 의미에 도달하지만 두 번째 궁극적 자력의 무효관은 신란 성인이 달성된 경지이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자력에 대한 집착에서 진정 처음으로 적나라하게 자력이 공덕이 없음을 자각한다.

비로소 이때 우리들은 버리기 어려운 자력을 여래의 본원 앞에 내던질 뿐이며. 이 한심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여래의 본원의 배에 승탁乘託 하는 것이다.

자력을 집착하는 마음은 버리려고 해도 저절로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절대적인 자력무효에 도달했을 때 자력은 자연스럽게 버려지는 것이다. 즉 자력을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버릴 수 없음을 자각할 때 버려지는 것이 된다.

이런 상태 즉 자력을 버릴 수 없음을 자각한 상태로 여래에게 맡겨지는 찰나, 자력은 있으면서 없는 상태가 된다.

  

즉 타력신행에 방해가 되었던 자력에 집착하는 마음이, 반대로 타력의 신행을 궁극적으로 도와주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신란이 항상 차분히 생각해 보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자력적인 마음의 문제에 항상 부딪쳤을 때의 자세이다.

 

우리에게 자력수행 능력이 있다면 이것 또한 일면의 자력이 유효함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력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고, 자력 수행의 무효를 알면서 여전히 자력망집을 버릴 수 없음에 부딪칠 때 처음으로 철저한 자력무효관이 성립된다.

진정으로 버릴 수 없는 자력이라 인정할 때 처음으로 버리지 못한 상태로 여래에게 가는 것이다. 자력을 버린다는 것은 자력을 버리는 노력의 무효함을 깨닫고 이 노력을 버리는 것이다.

 

버릴 수 없는 곳에서 버릴 때 진정한 묘미가 있다. 궁극적으로 자력을 버린다는 것은 자력을 그 대로 놓는다는 것이다. 자력을 그 대로 놓은 곳에 처음 타력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일체의 자력, 궁극의 자력, 자력을 버리려고 하는 곳의 자력, 이 자력이야 말로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버릴 수 있는 자력이다.

 

신란 우독초愚禿抄에서 의 심신深信은 죄악의 자각으로 자리신심이라 해석하였고, 의 심신深信은 부처님 원에 승탁乘託한 믿음으로 이타利他의 신해信海라고 하였다.

  

기의 심신 자리自利의 신심이다. 기의 심신深信은 자신을 심신深信하게 되어, 확실하고 깊게 자신을 믿는 것이다. 즉 자리의 신심이다. 그 자리란 즉 자력이라는 것이다. 자력이 끝나는 곳, 자력의 궁극적인 마지막은 자력의 무공無功인 곳이다. 그것이 자리의 신심信心이다.

  

다음 이타利他의 신해信海인 법의 심신, 타력의 시작한 곳이다. 첫 번째 자력 심신深信이 끝나는 곳에서 타력신심이 시작 된다. 즉 타력의 시작되는 곳은 자력의 끝나는 곳이다.

그 타력이라는 것을 열어보면 지금까지 자력으로 보였던 것 일체가 본래 타력이었음이다. 타력은 지금 시작하면서 생긴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타력이었음을 자각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력이란 중생들이 자기 마음속에서 맛보는 깨달음이다.

여래는 온 힘을 다한 자력의 한계점 즉 말로 할 수 없는 조재영겁의 보살행(수행)을 하여 우리들 범부를 구제하여 주시는 것이다.

  

묘호인妙好人의 노래

사람은 타력타력이라고 기뻐하지만

                            나는 아미타불의 자력이 감사하네.

법장의 수행 장소는 어딘가?

                            모두 나의 마음속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범부가 부처가 되는 것은

                            부처가 범부가 되어 범부를 부처가 되게 하는 것 나무아미타불!

 

어떤 의미에서 자력을 부정하는 고통은 일반적인 집착심에서 생기는 고통보다 더욱 깊은 고통이다 된다. 절대 타력의 대도大道를 이론상으로 말하면, 인간이 갖는 최상의 지혜로 쉽게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사실상으론 도달하기 힘든 난신難信의 일도一道인 것이다.

 

어떻게 이 탁악濁惡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여래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실제적 방법을 설한 것이 타력관他力觀이다. 절대타력은 너무나 순결하고 숭고한 까닭에, 탁하고 죄 많은 인간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까닭에 번뇌로 가득한 상대적인 인간 세상에 맞추어 상대타력으로 구제하는 것이다.

상대 타력은 여래에 대한 인간 힘을 인정하여 여래 인간 양자 간에 평등한 상대적 존재로 놓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절대타력의 가르침은 전혀(절대적) 여래를 중심으로 하고 상대타력의 가르침은 오로지 인간을 중심으로 하기에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여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갖는 궁극의 이성理性인 여래의 지혜바다에서 보면, 관련된 자기중심의 신념은 또한 일종의 미망迷妄한 교만하고 게으른 세계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자아自我의 위에 세워진 칠보궁전 안에 있는 망집妄執이 우리들 인간의 본성인 까닭에, 이 불합리하고 게다가 버리기 힘든 자력, 본디 가지고 있는 온갖 욕망 위에 여래의 광명의 종교를 건설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적인 신념은 도저히 상대타력의 경지에서 나올 수 없다. 게다가 진실한 우리들의 마음으론 도저히 상대타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절대 타력의 풍광을 희미하게 동경한다.

말을 바꾸면, 우리들은 상대타력을 넘어 절대타력을 바라며, 그 마음은 완전히 자아를 집착하는 성향을 띠며, 상대타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집착이야말로 타력신념 위에서 보면 깊은 비통함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이 비통함이 있는 신앙은 언제나 깨끗하고 산뜻한 생명을 갖게 한다. 그리고 절대타력은 여래의 지혜바다 위에서, 범부의 티끌만한 망상도 머무르지 않는 곳에 서게 된다면 상대타력은 버릴 수 없는 우리들의 자력아집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여래의 대비 위에 건설하게 되는 성과를 얻을 것이다.

  

만약 대자비한 여래를 염하지 않으면 자기의 존립을 인정하는 자기중심의 신념인 상대타력관은 의미 없는 미신과 망상이 된다. 그런데 깊은 여래의 대비를 염할 때, 큰 지혜의 여래를 전적으로 의심하며 잘못 믿었다는 곳에 도달한 상대타력관이 홀연히 금강의 진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즉 상대타력인 완전하고 철저하지 않은 자력에 미혹한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여래의 대자비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라 말해야 한다.

 

우리들이 희미하게 절대타력을 동경 할 때, 홀연, 자기 존립의 실제 문제에 봉착하는 순간 대자대비 한 여래를 자기의 마음속에 모시어 예배하는 것으로 마침내 상대타력의 형태로써 진실의 신념은 탄생하는 것이다.

구원받기 어려운 몸이라고 믿는 기의 심신深信은 여래에게 구원받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신심인데, 신란은 이것을 자리의 신심이라고 했다. 자리自利란 즉 자력인 것이며 즉 이는 자력의 끝나는 곳이며, 그 자력의 궁극의 자리, 자력이 무의미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自利의 신심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이타利他의 신해信海로 해석한 두 번째 법의 심신은 여래에게 맡기는 타력의 시작지점이다. 첫 번째의 자력 심신深信이 끝나는 곳에 타력신심의 시작이 있다. 그와 같이 타력의 시작되는 곳이 자력의 끝나는 점이다. 인간의 유한有限한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여래의 절대적인 지혜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의 한계적인 지혜인 상대적인 분별이 끝난 곳에 여래의 절대타력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절대라는 말이 붙어 오로지 타력만이 중요하다거나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못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절대타력이라는 것은 자력의 분별이 끝난 곳에 타력이 시작되며 그 타력의 문이 열리게 되면 지금까지 자력으로 보였던 것 모든 것이 본래 타력이었음을 알게 된다.

 

타력은 지금 처음생긴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타력이다. 뭐든지 타력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타력이다 타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력 망념의 찢어진 곳에 처음으로 타력이라는 것이 보인다. 그 타력을 한번 보게 되면 타력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본래부터 있다고 하여 누구나 본래부터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볼 수 없는 사람은 시작하는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시작하는 곳을 찾기 위해서는 자각自覺이 중요하다. 그래서 즉 믿음을 축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

  

자력 타력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신심의 체험에서 느껴지는 사실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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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일본 정토진종의 고덕이신 일행사 주신이신 나스선생님이 성진스님께 보내주신 편지를 번역하여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