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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의 신행체계와 염불수행 - 정목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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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1-04 14:10 조회2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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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의 신행체계와 염불수행

종교의 가르침은 세계의 실상을 밝혀 세계관 및 가치관을 정립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한다. 그 가르침의 진가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인류의 문화사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어떤 종교는 세계관이 실상에 부합하는 지 의심되더라도 신행생활이 인류의 안심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 실천을 전개한다면 그 세계관은 종교적 신념으로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세계의 실상에 부합하는 위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된 종교라 할지라도 신행생활이 개인의 안심에 머물러 있다면 삶의 현장에서 생명력을 잃고 말 것이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취하신 지혜로써 자연과 생명의 실상을 밝히고 이상적인 삶의 가치관을 보여 몸소 실천하신 가르침이다. 우리들은 부처님의 지혜를 진실로 믿고 개인의 안심을 넘어 보리심을 일으키고 정진하여, 위로는 무상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며,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동체대비심을 구현하여 다 함께 행복한 정토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수행한다. 이러한 까닭에 시대와 근기 및 수행문이 지향하는 목표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반드시 바르게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길을 밝힌 신행체계가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수행문에만 집착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바라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여 서로의 주장으로 다툼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어떤 사람은 구도의 열정은 깊지만 바른 길을 걷지 못한 때문에 삿된 견해로 업을 지어 오히려 고뇌의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 이에 대승의 조사들은 모든 수행문에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바른 신행체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소납은 오랫동안 궁구한 끝에 조사의 뜻을 받들어 대승불교의 신행체계를 선보였다. 그리고 불법에 귀의한 모든 불자들이 비록 자신이 선택한 수행문은 다를지라도 믿음의 대상과 지향하는 목표를 함께 하여 근기의 다양성을 긍정하고 다툼을 화해하며 화합된 승가, 안심과 희망으로 정진하는 승가의 모습이기를 발원하였다. 또한 이 시대의 상황과 근기에 가장 적합한 수행이라고 믿고 행한 염불수행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신행체계를 정립하였다.

 

대승불교의 신행체계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무량수경종요≫ ≪아미타경소를 근간으로 이루어졌고, 염불수행은 원효의 일심정토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둔다.

 

불법에 귀의하여 복과 지혜가 증장하는 길은 바른 신행체계를 밟아 닦는 것이며, 불교의 세계화는 한국불교의 내실화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비록 소납이 미천한 수행력으로 선보인 신행체계이지만 이를 계기로 보다 깊은 탐구와 수행력으로 고뇌하는 민중에게 안심과 희망을 부여하는 온전한 신행체계가 정립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안심

안심(安心)은 삶에서 야기되는 지엽적인 고통과 번뇌를 소멸하거나 바램을 성취하는 데서 얻는 안심이 아니라, 고뇌의 근원을 해결함으로써 얻는 안심을 말한다. 이와 같은 안심을 얻는 데는 두 길이 있다. 첫 번째는 예토에서 지관의 힘으로 묘관찰지를 통찰함으로써 공() 무상(無相)의 도리를 깨달아 안심을 얻는다. 두 번째는 성소작지에 의지하여 자비광명을 우러러 생각하는 신앙의 빛으로 삼계를 뛰어넘는 정토에 태어나면 윤회는 없다는 믿음으로 안심을 얻는다.

 

3. 발심

발심(發心)은 삼신(三身)의 지혜에 뜻을 두고,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고, 선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무량수경종요에서 밝힌 발심의 뜻은 다음과 같다.

 

무상보리심을 일으킨다[발무상보리심=발심]는 것은 세간의 부()와 즐거움() 및 이승(二乘)의 열반을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이 삼신(三身)의 지혜에 뜻을 두고 원하는 것이니, 이를 무상보리심[無上菩提之心 : 무상보리로 가는 마음]이라 부른다. 전체적으로 표시하면 비록 그러하지만 그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수사발심(隨事發心)이요, 둘째는 순리발심(順理發心)이다.

 

수사발심(隨事發心)

수사발심은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고, 선법(善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한다. 이 세 가지 일을 결정하여 기약하고 원하는 것이다. 처음의 마음은 여래의 단덕정인(斷德正因)이요, 다음의 마음은 여래의 지덕정인(智德正因)이요, 세 번째 마음은 여래의 은덕정인(恩德正因)이다. 삼덕이 합하여 무상보리의 열매가 된다. 곧 이 삼심은 모두가 무상보리의 씨앗이 된다. 씨앗과 열매가 비록 다르지만 넓고 긴 양은 나란하고 같아서 남김도 없고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에서 말씀하시기를 발심과 필경은 둘이 차별이 없으나 이와 같은 두 마음 중에 앞 마음이 더 어렵다. 자신은 제도하지 못했지만 남을 먼저 제도한다. 그러므로 나는 초발심에 경례하노라.’하신 것과 같다. 초발심의 열매는 비록 지혜이지만 그 꽃이 피는 과보는 정토에 있다. 왜냐하면 보리심의 양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하고 장원무한(長遠無限)하다. 그러므로 능히 광대하여 끝없는 의보의 정토와 길이 멀어 무량한 정보의 수명을 감득한다. 보리심을 제외하고는 저 의보와 정보를 능히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설하여 왕생의 정인(正因)으로 삼았다.

 

 

순리발심(順理發心)

순리발심은 모든 법이 다 허깨비 같고 꿈과 같아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므로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경계임을 믿고 이해하여, 이 믿고 이해하는 데에 의지하여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비록 번뇌와 선법(善法)이 있음을 보지 못하지만 가히 끊고 닦을 것이 없다고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비록 모두 끊고 모두 닦기를 원하지만 무원삼매(無願三昧)를 어기지 않는다. 비록 무량한 중생을 모두 제도하기를 원하지만 제도하는 자와 제도 받는 자를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공()과 무상(無相)을 따른다. 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무량한 중생을 멸도(滅度)하지만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느니라.’하시며 널리 설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발심은 불가사의하다.”

 

4. 수행

수행(修行)은 참선, 염불, 간경, 주력 등, 이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여 선택한 수행문에서 정진하는 것이다. 수행문마다 신행체계가 정립되어 있으나 이것은 좁은 의미의 신원행(信願行)이므로 반드시 대승의 신행체계를 전제로 이해하여야 한다.

 

5. 정정취

정정취(正定聚)는 묘관찰지를 깨달아 안심을 얻고, ()무상(無相)의 도리에 따라 발심하는, 즉 순리발심 하여 무원(無願)으로 실천하는 보살이다. 자신의 이익을 만족하고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행과 무원으로 회향하는 삶을 깊고 넓게 행하며 정진한다. 정정취는 위로는 무상보리를 원하여 물러남이 없고 아래로는 선근을 끊는 삼악도로 물러나 떨어지지 않는다. 염불수행에서는 성소작지를 믿고 행하여 정토에 태어나 정정취에 들어간다. 정정취에 들어가야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 즉 위로는 무상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정정취는 보살계위 십해(十解),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에 해당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를 믿고, 이해하고 행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구현하고,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상구보리, 위로 보리를 구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여 나아가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화중생,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중생을 교화는 데는 법시(法施)와 재시(財施)와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그 가운데 중생을 교화하는 요체는 법시이며,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의혹을 제거한다.’는 것은 대승의 유일한 법()은 일심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교문(敎門)은 진여문(眞如門)에 의지하여 지행(止行)을 닦고, 생멸문(生滅門)에 의지하여 관행(觀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란 경계상(境界相)을 그치게 하는 것이며, 경계상을 그치면 분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지혜롭게 분별하는 것이며, 생멸문에 의지하여 법상(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말한다. ()와 관()을 쌍으로 닦아 일심의 바다에 들어가고 일심의 지혜로써 생멸상을 관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지와 관을 겸하여 운용하면 만 가지 행이 다 여기에 갖추어진다. 이 두 문에 들어가면 모든 문은 다 통하게 된다.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한다.’는 것은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인집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며, 법집은 대상 경계에 대한 집착이다.

 

6. 회향

회향(廻向)은 정정취의 행 가운데 으뜸을 말하며, 자신의 공덕을 남에게 돌려 베푸는 행이다. 이것은 중생의 고뇌를 버리지 않겠다고 마음에 항상 원을 세워 대비심을 성취하려는 보리심의 작용이며, 남을 위해 베풀되 온전한 무원의 선행이다.

 

7. 일심증득

일심증득(一心證得)은 무수한 번뇌를 모두 끊고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진여 청정심 · 법신을 성취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자연히 동체대비심을 일으키고, 무량한 덕성인 보신의 지혜가 증장하며, 다양한 근기의 중생을 제도하는 화신의 지혜를 성취해 나아간다. 일심증득은 평등성지를 성취한 초지보살에 해당한다.

 

귀일심원 동체대비

무수한 번뇌를 모두 끊고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법신이라 부르며, 평등성지를 성취한 초지보살이다. 이 보살은 자연과 생명, 일체가 한마음이요, 한몸이라는 일심(一心)의 지혜를 증득하여 자연히 동체대비심을 일으킨다. 일심의 지혜로 무량한 선법을 닦아 무량한 덕성인 보신을 이루기 위해 정진한다. 또한 고뇌하는 중생의 상황과 근기에 따라 이익 되도록 은혜를 베풀고 교화하는 화신의 삶을 끝없이 행한다. 법신 보신 화신, 이 삼신의 지혜인 무상보리를 성취하는 것이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대승의 신행체계는 정정취에 들어가 위로는 무상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며,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동체대비심을 구현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까닭에 불교의 목적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귀일심원 동체대비(歸一心源 同體大悲)’라고 말하는 것이다.

 

2) 네 가지 지혜

부처님의 지혜를 전체적으로 나타낸 총지를 일심이라 하고, 이 일심으로부터 성취한 네 가지 지혜를 사지(四智)라 부른다. 이 사지의 해설을 무량수경종요에 의거하면 다음과 같다.

 

성소작지(成所作智)

성소작지는 부처님이 불가사의한 일을 성취하신 지혜이다. 이 지혜에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일체 중생은 생사해탈을 성취한다.(성소작지는 염불수행에 해당하므로 염불수행에서 싣는다.)

 

묘관찰지(妙觀察智)

불가칭지(不可稱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말한다. 이 지혜는 가히 말할 수 없는 경계를 관찰한다. 말하자면, 일체의 법은 모두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아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어서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경계이므로 말을 쫓는 자가 능히 말하거나 헤아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가칭지라 이름 한다.”

묘관찰지는 연기의 세계관에 대한 깨달음이며, 연기하는 모든 법을 비유비무로 관찰하는 지혜이다. 관찰은 대상경계에 대한 지관(止觀)이다.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승광지(大乘廣智)란 평등성지(平等性智)를 말한다. 이 지혜는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소승을 향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무아(無我)에서 즐겁게 지내기 때문에 아()가 아닌 것이 없다. ()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평등하게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 이러한 한 몸(同體)이라는 지혜의 힘으로써 무변한 중생을 널리 실어 모두 함께 무상보리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므로 대승광지(大乘廣智)라 이름 한다.”

평등성지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동체대비심으로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이다.

 

대원경지(大圓鏡智)

무등무륜최상승지(無等無倫最上勝智)란 바로 여래의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말한다. 처음부터 본식(本識)을 전환하여 비로소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 일체종(一切種)의 경계를 원만히 비추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대원경지(大圓鏡智)라 이름 한다.

 

이 하나의 지혜 가운데는 다섯 가지의 수승함이 있다. 해탈신(解脫身) 같은 것은 이승(二乘)이 함께 얻을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대원경지는 바로 법신이어서 저들이 함께 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등(無等)이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수승함이다. 앞의 세 가지 지혜와 같은 것은 보살이 점차로 얻을 수 있지만, 대원경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단박에 증득하여 다시 나머지 부류들과 견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무륜(無倫)이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수승함이다. 부사의지(不思議智)보다 뛰어났으니 최()라 한다. 불가칭지(不可稱智)보다 뛰어났으니 상()이라 한다. 대승광지(大乘廣智)보다 너그러우므로 승()이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의 수승함이다. 그러므로 무등무륜최상승지(無等無倫最上勝智)라 이름 한다.”

대원경지는 일체 법을 다 비추고 다 아는 지혜이다. 대원경지는 부처님이 단박에 성취하신 무상보리(無上菩提)이며, 삼신(三身)의 지혜이다. 보살은 점차 닦아 성취한다.

 

대승의 신행체계에서 보인 첫 단계의 신심(信心)은 지금까지 보인 일심 및 네 가지 지혜를 우러러 믿는 마음이다.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들이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여 스스로 성취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을 결정해야 바른 길에서 정진할 수 있다.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진여문(眞如門)불생불멸 체대(體大)-법신

일심 (중생심)

생멸문(生滅門)()()

()(1) 여래장 성공덕상(如來藏 性功德相). 상대(相大)-보신

(2) 진여의 염상(染相).

()(1) 여래의 불가사의한 업용(業用). 용대(用大)-화신

(2) 진여의 정용(淨用).

 

대승이란 총괄하여 설명하자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뜻[]이다. 법이란 중생의 마음[衆生心]이며, 뜻이란 체() () ()이다. 대승 가운데 일체의 모든 법이 각기 별다른 체가 없고 오직 일심으로 그 자체를 삼기 때문에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섭하니,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진실로 이 마음이 모든 법을 통섭하여, 모든 법 자체가 오직 이 일심이니, 소승의 일체 모든 법이 각기 자체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심을 대승(大乘)의 유일한 법으로 삼는다.

 

일심이란 무엇인가? 일심은 대승(大乘)의 유일한 법()이다.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므로 일심은 곧 중생의 마음이다. 일심은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이라는 뜻이다. 일심은 무명으로 나타난 오염된 현상 및 지혜의 공덕상인 청정한 현상 등, 일체 만법을 통괄한다.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신해(信解)하여 연기즉공’(緣起卽空)을 통찰함으로써, 일체 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이다. 일심은 무아(無我)인 대아(大我)의 생명이며, 우주적 생명이다. 일심은 자신에게 내재하면서 일체의 경계를 포섭한다. 자신의 마음은 보는 마음이고, 일체 경계는 보이는 마음이다. 곧 일체 경계는 자신의 경험이 축적된 의식의 반영이다.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인 지혜에 대하여 믿음을 결정하는, 즉 결정신심(決定信心)을 일으키는 것이 대승에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이다.

 

이문이란 무엇인가? 심법(心法)은 하나이지만 두 문이 있으니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다. ()는 진여문에 있고, () ()은 생멸문에 있다. 생멸문 안에도 자체가 있지만, 다만 체로써 상을 따르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았다. 심진여(心眞如)는 일심의 근원이다. 진여는 일체의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모든 부처님이 평등하게 본래 소유하며 생멸함이 없고 변함이 없는 마음의 본성이다. 심생멸(心生滅)은 마음이 일으킨 생멸하는 현상이다. 생멸하는 현상은 지혜의 덕상 및 범부의 마음이 반영된 일체 현상을 포함한다.

 

체상용과 삼대란 무엇인가? 대승의 뜻[]은 체() () ()이다. 여기에는 삼대(三大)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는 일심의 근원이며, 마음의 본성인 진여(眞如)이다. 진여는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일체 중생이 차별이 없는 마음의 본성이므로 크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체대(體大)라 부른다. 또한, 진여인 성품이 무량한 공덕의 부사의(不思議)한 불법(佛法)을 다 갖추고 만족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은 진여로부터 연기(緣起)한 현상이다. 상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여래장에 진여인 성품이 갖춘 무량한 공덕, 즉 여래장 성공덕상(如來藏 性功德相)이며, 무량한 공덕으로 크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상대(相大)라 부른다. 상의 두 번째 뜻은 진여로부터 연기(緣起)한 염상(染相)이며, 범부가 무명 업식으로 보는 오염된 모습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상(: 相大와 다름)이라 한다.

 

(은 지혜의 작용이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본래 힘입은 바가 되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모두 이 법에 힘입어서 여래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용이라 한다. 용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여래의 불가사의한 업용(業用 : 여래의 대자비행. 화신)이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므로 크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용대(用大)라 부른다. 두 번째 뜻은 진여가 일으킨 정용(淨用)이며,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과(因果)를 잘 드러낸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용(: 用大와 다름)이라 한다.

 

진여(眞如)의 청정한 법()은 실로 물듦이 없지만, 다만 무명(無明)으로 훈습(薰習)되기 때문에 곧 오염된 모습이 있는 것이다. 무명의 오염된 법은 본래 청정한 법이 없지만, 다만 진여로 훈습되기 때문에 곧 정용(淨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지금은 비록 무명으로 인하여 고뇌하는 범부이지만 부처님의 지혜를 진실로 믿고 정진하면 마침내 본래 소유한 지혜광명을 발하여 착한 인과(因果)를 드러내고 무량한 공덕을 뜻대로 베풀 수 있을 것이다.

대승의 신행체계

 

신심-안심-발심-수행-정정취-회향-일심증득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를 믿는 종교이다.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는 신심을 근본으로 그 지혜를 성취하여 위로는 무상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사회적 실천을 다하며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동체대비심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수행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보인 것을 대승의 신행체계라 이름 하였다.

 

대승의 신행체계는 신심 안심 발심 수행 정정취 회향 일심증득이다. 이는 선오후수문(先悟後修門)이며 단박에 행하거나 점차 행하는 것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기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이 길은 소승과 대승을 포섭하여 복과 지혜가 증장하는 지름길이다. 대승의 신행체계에서 첫 번째는 신심(信心)이니, 먼저는 신심의 대상인 부처님의 지혜를 보이고 신행체계를 따라 해설할 것이다.

 

1. 신심

1) 일체경계는 본래일심

일체경계는 본래일심이며, 대승의 유일한 법은 일심이다. 일심은 우러러 믿어야할 대상이며, 수행하여 마침내 성취해야 할 법이다. 일심은 부처님의 지혜를 총체적으로 보인 총지(總智)이다.

일체경계는 본래일심(一切境界 本來一心)이어서 상념(想念)을 여의었으나, 중생이 경계를 잘못 보기 때문에 마음에 차별된 경계가 있는 것이다. 상념을 잘못 일으킴으로써 법성[法性 : 번뇌 없는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상[: 이분법적 객관 세계]과 견[: 이분법적 인식작용]을 여의어서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곧 이것은 모든 법의 성품이다. 그 자체가 일체의 망법(妄法)을 환하게 비추고, 대 지혜의 작용이 있어서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이 응당히 이해하는 것에 따라서 일체 법의 뜻을 모두 능히 열어 보이신다. 그러므로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 한다.” 대승기신론

 

왜 일심이라 하는가?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아니어서 참됨과 허망함의 두 문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이라 이름 한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의 실체이나, 허공과 같지 않아서 본성이 스스로 신령하게 알기 때문에 ’()이라고 이름 한다.”대승기신론소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여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자연히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일으킬 수 있다. 일심의 근원에 있는 보살이 불보(佛寶)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法寶)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가 승보(僧寶)이다. 일심이 곧 삼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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